Richard Tuschman : Edward Hoffer Meditations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3.32

역사적으로 ‘도시’는 시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도시의 공기가 시민에게 자유를 선사한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는 전통적인 농촌과 다른 자유의 공간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의 존재에 익숙한 농촌 공동체와는 달리 도시 사회는 익명이라는 자유를 선물한다. 하지만 근대 도시는 또 다른 풍경들을 보여줘 왔다. 게오르그 짐멜은 도시의 또 다른 풍경을 관찰한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도시생활의 불친절함과 외로움이다. 도시인들은 예상하지 못한 빠른 변화와 다양한 이미지의 공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상에 거리를 두는 무관심 전략을 선택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결국 불친절함과 외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급진적 도시사회학자들이 관찰한 또 다른 도시의 풍경도 있다. 이들은 현대 도시를 지배하는 자본과 상품에 주목한다. 건물, 거리, 경관 등 도시의 모든 것들을 끝없이 상품화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자본은 정작 도시의 주인인 시민을 소외시키고 있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도시 경관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외로움을 안겨주는 이유다.

도시의 다양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온 대표적 화가가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다. 회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두 번쯤은 봤을 정도로 호퍼의 그림은 유명하다. 특히 한밤 길거리 카페를 그린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1942)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길게 이어진 바를 사이에 두고 한 커플과 종업원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고, 다른 한 사람은 뒷모습을 보인 채 앉아 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담겨 있는 풍경이다. 호퍼가 도시 풍경만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케이프 곶의 저녁’(Cape Cod Evening·1939) 역시 호퍼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숲에는 어둠이 이미 내리고 밖은 여전히 환한 어느 저녁, 현관 앞에서 쉬고 있는 부부와 풀밭에 서 있는 개를 담은 작품이다.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개를 포함해 서로 엇갈리는 시선들은 전원생활의 한적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호퍼의 그림은 어렵지 않다. 20세기 전반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와 비교할 때 호퍼의 작품은 소박하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그 소박한 사실주의는 쓸쓸함과 함께 편안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팍팍한 도시생활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한 번쯤은 겪은 듯한 풍경을 평범한 듯 날카롭게 포착해냄으로써 호퍼는 공감에 기반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미술분야를 마감하는 이 글에서 호퍼의 그림을 살펴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예술이 가져야 할 공감에 관한 것이다. 서양 미술사를 보면 20세기 들어와 회화는 감상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예술사 전체를 돌아볼 때 리얼리즘을 이은 모더니즘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정체성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 예술가의 자의식은 물론 표현 대상 및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미술 감상에서 상반된 경향을 낳았다. 엘리트 감상자 층은 다다이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를 환영했지만, 시민적 감상자 층은 갈수록 난해해지는 작품들에 공감을 갖기 어려웠다. 호퍼는 전통적 리얼리즘을 따름으로써 시민적 감상자 층에 가깝게 다가섰다. 특히 그가 그린 쓸쓸한 도시와 한갓진 전원의 풍경들은 불친절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안겨줬다. 둘째는 예술적 공감이 갖는 사회적 의미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즐기기 위해 경험되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즐기기 위해 경험된다는 것은 그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자기 삶과 사회를 돌아보게 되는 것을 함축한다.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던진 질문의 하나는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존재’로, 한나 아렌트는 ‘소통하는 존재’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성격 가운데 어떤 것을 중시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최근 주목할 주장을 내놓은 이는 제러미 리프킨이다. 그는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homo empathicus)로 파악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인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공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호퍼의 작품은 이러한 리프킨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호퍼의 그림은 쓸쓸한 사람과 자연에 대한 연민 또는 공감을 담고 있으며, 바로 이 호퍼의 감정은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감정이입돼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한 연민 또는 공감을 갖게 한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위적인 문학이나 예술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폭넓은 경험과 감정의 영역이다. (…) 어떤 오브제와 대면했을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 나의 내면에서 이는 반응을 화폭 위에 포착하는 일이다.”

호퍼가 1939년에 남긴 말이다. 유럽에서 초현실주의가, 미국에서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가 위세를 떨쳤을 때에도 그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해온 이유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발언이다. 평범해 보이는 듯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 호퍼는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호퍼의 작품이 너무 비정치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호퍼가 주로 활동했던 기간은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확립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격렬한 사회 변동의 시대였다. 나 역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화가들이 그렇다고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 호퍼에게 중요한 것은 인위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체험과 느낌이었으며, 그는 이를 화폭에 담음으로써 동시대인들과 소통하려고 했다. 21세기 현재는 리프킨이 강조하듯이 오픈 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제3차 산업혁명 시대다. 자기와 타자, 개인과 집단의 생존에 유리하게 진화돼온 공감의 능력은 존재하는 사실인 동시에 지향해야 할 가치다. 이러한 공감의 능력을 높이는 데에 예술만한 게 없다. 열리는 공감의 시대에서 호퍼의 그림은 건조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삼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1.36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1.46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1.56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2.06

 

Richard Tuschman은 ‘에드워드 호퍼의 명상들’이란 컨셉으로 호퍼의 그림을 사진으로 옮겨 촬영하였다.  그는 그의 스튜디오에 호퍼의 그림과 유사한 디오라마 세트를 제작하고 그곳에서 조명과 효과를 호퍼의 그림과 유사하게 셋팅한 후에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진에서 보이는 소품이나 의상 모델의 느낌이 상당히 유사한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들어 호퍼에 관련된 이미지가 많이 제작되고있는데, 캐나다에서 제작된 ‘셜리의 모든것’이란 영화도 호퍼의 그림으로 영화한 것이니 호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볼만할 것이다.

영화는 지금도 선재아트센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

Richard Tuschman의 작업은 그의 Website 에서 더 볼 수 있다.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2.19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2.28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2.39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2.48

 

 

스크린샷 2014-08-06 오후 4.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