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행위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고, 말 그대로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여기저기에 넘쳐나면서부터다. 보들레르의 산책자Flâneur도 근대화와 도시화 속에 탄생했다. ‘산보, 빈들거림, 나태함’을 뜻하는 flânerie에서 유래한 말로 보통 ‘만보객漫步客’이나 ‘만유가漫遊家’라고 번역되는데, 그 위에 ‘한량’의 의미가 겹쳐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 산책자들의 특성이라면 역시 ‘게으름’이 으뜸이다.
어째서 게으름일까? 도시 자체가 눈을 사로잡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였고,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보행자들은 관객이 되었다. 하지만 바쁜 걸음을 재촉해 도시를 관통하는 익명의 개인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무대 위의 등장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니 가장 사려 깊은 관객은 들판을 산보하듯 ‘도시를 거니는’ 산책자들이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목적지도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 걸으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을 내딛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사진은 이 게으른 산책자들의 시선과 가까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살펴보아야할 것이 있다. 휴대 가능한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사진에 대한 접근성이 보다 넓어지면서, 그리고 회화적인 사진이 아니라 스트레이트 사진에의 열의가 공유되면서 단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도시 이미지의 채집이 활성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의 특별하지 않은 장면을 포착해 인화지 위에 박제화 시키는 사진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 이면에 ‘산책자’라는 존재가 함께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진은 비로소 ‘걷는다’는 행위와 함께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를 제 존재 항목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재훈 역시 집을 나서면 걷기 시작하는 것이 이 사진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앞에 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새로울 것 없는 이미지의 포섭 방식, 즉 도시산책자의 사진이 매번 각기 다른 힘, 각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르누보풍의 문양이 있는 유리창, 번들거리는 외벽 앞에 세워진 자그마한 날개의 니케Nike, 비닐이 씌워진 채 쇼윈도에 놓인 금박 불상, 맥주집 앞의 마릴린 먼로는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할 장소(1897년 드레스덴 박람회의 아르누보 양식, 사모트라케 섬의 니케상, 도갑사의 아미타불,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 있던 마릴린 먼로)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색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본 자체를 완벽하게 닮을 수 없었기에 그것들은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낯설다.
어째서 게으름일까? 도시 자체가 눈을 사로잡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였고,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보행자들은 관객이 되었다. 하지만 바쁜 걸음을 재촉해 도시를 관통하는 익명의 개인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무대 위의 등장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니 가장 사려 깊은 관객은 들판을 산보하듯 ‘도시를 거니는’ 산책자들이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목적지도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 걸으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을 내딛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사진은 이 게으른 산책자들의 시선과 가까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살펴보아야할 것이 있다. 휴대 가능한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사진에 대한 접근성이 보다 넓어지면서, 그리고 회화적인 사진이 아니라 스트레이트 사진에의 열의가 공유되면서 단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도시 이미지의 채집이 활성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의 특별하지 않은 장면을 포착해 인화지 위에 박제화 시키는 사진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 이면에 ‘산책자’라는 존재가 함께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진은 비로소 ‘걷는다’는 행위와 함께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를 제 존재 항목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재훈 역시 집을 나서면 걷기 시작하는 것이 이 사진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앞에 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새로울 것 없는 이미지의 포섭 방식, 즉 도시산책자의 사진이 매번 각기 다른 힘, 각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르누보풍의 문양이 있는 유리창, 번들거리는 외벽 앞에 세워진 자그마한 날개의 니케Nike, 비닐이 씌워진 채 쇼윈도에 놓인 금박 불상, 맥주집 앞의 마릴린 먼로는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할 장소(1897년 드레스덴 박람회의 아르누보 양식, 사모트라케 섬의 니케상, 도갑사의 아미타불,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 있던 마릴린 먼로)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색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본 자체를 완벽하게 닮을 수 없었기에 그것들은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낯설다.